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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즈카 주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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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즈카 주스케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유격수와 3루수로 활약했다. 난카이 호크스, 긴테쓰 펄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통산 479도루로 한때 프로 야구 기록을 세웠다. 4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했으며, 7번의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은퇴 후에는 코치로 활동했으며, 198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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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즈카 주스케 - [인물]에 관한 문서
선수 정보
선수명기즈카 주스케
로마자 표기Chusuke Kizuka
가나きづか ちゅうすけ
한자木塚 忠助
출생지사가현 가라쓰시
생년월일1924년 4월 23일
사망일1987년 12월 16일
신장168
체중60
利き腕오른손
타석
수비 위치유격수
프로 입단 년도1948년
첫 출장1948년 4월 4일
최종 출장1959년 10월 15일
1955년의 기즈카 주스케
1955년
선수 경력
아마추어모지 철도국
프로난카이 호크스 (1948 - 1956)
긴테쓰 펄스 (1957 - 1959)
코치 경력
코치긴테쓰 버펄로스 (1962 - 1966)
도쿄 오리온스 (1967 - 1968)

2. 선수 경력

가라쓰히가시 중학교를 졸업하고 철도부 모지 관리국에서 3루수를 맡아 빠른 발, 강한 어깨, 강한 타격을 겸비하여 ‘모지 철도의 붉은 악마’라고 불렸다.[15] 1948년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하여 1년 차부터 주전으로 활약했는데, 강한 어깨는 ‘'''바보 어깨'''’라고 불렸고 빠른 발과 함께 인기가 높았다. 야마모토 가즈토(쓰루오카 가즈토)의 가랑이 사이를 빠져나간 타구를 1루로 멀리 던져 잡아냈다는 전설적인 일화도 있다. 기즈카의 수비는 견고함보다는 화려함이 돋보였으며,[16] 수비 범위가 넓었고 송구하는 흐름 속에서 공을 잡아[16] 화살 같은 공을 던졌다.[16]

1949년부터 4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했다. 이 4년간 246개의 도루를 기록했으며 성공률은 8할 5푼 5리에 달했다.[16] 타율 3할을 3번 기록했으며 야마모토, 이이다 도쿠지, 가게야마 가즈오와 함께 '''백만 달러의 내야진'''을 구성했다. 역대 최고의 유격수 중 한 명이라는 평가도 받았다.[16] 1949년 9월 29일 다이요 로빈스와의 첫 경기에서 1경기 6차례의 실책(유격수 3개, 3루수 3개)을 기록했다. 직후 두 번째 경기인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혼도 야스지가 2루수로 1경기 4차례의 실책을 기록했기 때문에 그라운드 정비 불량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6월 5일 니시테쓰 클리퍼스전에서는 7회에 1이닝 3도루(일본 타이 기록)를 기록했다.[17]

1956년 시즌에 타선의 대형화를 도모하던 구단의 구상에서 벗어나 긴테쓰 펄스에 트레이드로 이적했고 1959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이후에는 긴테쓰와 도쿄 오리온스에서 코치를 맡았다.

양대 리그 출범 첫 해인 1950년 투수들이 주로 다는 14번으로 변경했고 1952년까지 4년 연속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는데,[19] 이들 중 78도루를 기록한 1950년 도루 실패는 불과 8개였으며 긴테츠 이적 후에도[20] 14번을 달았다.

2. 1. 프로 입단 전

가라쓰 중학교(현 사가현립 가라쓰히가시 고등학교) 출신이다. 야구를 시작한 것은 3학년 때로 늦었지만, 5학년 때는 사가현 대회에서 한 경기 16 탈삼진을 기록하는 호투를 보여 프로 야구에서도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경찰관인 아버지의 권유로 철도성 모지 철도국에 입단했다.[2]

2. 2. 난카이 호크스 시절 (1948년 ~ 1956년)

사가현립 가라쓰히가시 중학교를 졸업하고 철도부 모지 관리국에서 3루수를 맡아 빠른 발, 강한 어깨, 강한 타격을 겸비하여 ‘모지 철도의 붉은 악마’라고 불렸다.[15]

1948년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하여 1년 차부터 주전으로 활약했다. 강한 어깨는 ‘'''바보 어깨'''’라고 불렸고 빠른 발과 함께 인기가 높았다. 3루의 정수비 위치를 지키고 있던 야마모토 가즈토(쓰루오카 가즈토)의 가랑이 사이를 빠져나간 타구를 1루로 멀리 던져 잡아냈다는 전설적인 일화도 있다. 기즈카의 수비는 견고함보다는 화려함이 돋보였으며,[16] 수비 범위가 넓었고 송구하는 흐름 속에서 공을 잡아[16] 화살 같은 공을 던졌다.[16] 1949년부터 4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했다. 이 4년간 246개의 도루를 기록했으며 성공률은 8할 5푼 5리에 달했다.[16] 타율 3할을 3번 기록했으며 야마모토, 이이다 도쿠지, 가게야마 가즈오와 함께 '''백만 달러의 내야진'''을 구성했다. 역대 최고의 유격수 중 한 명이라는 평가도 받았다.[16]

1949년 9월 29일 다이요 로빈스와의 첫 경기에서 1경기 6차례의 실책(유격수 3개, 3루수 3개)을 기록했다. 직후 두 번째 경기인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혼도 야스지가 2루수로 1경기 4차례의 실책을 기록했기 때문에 그라운드 정비 불량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6월 5일 니시테쓰 클리퍼스전에서는 7회에 1이닝 3도루(일본 타이 기록)를 기록했다.[17]

1947년 오프, 그 해에 문철에서 프로에 입단한 나카타니 노부오와 관련하여, 난카이 호크스, 전에 킨샤군의 매니저 시절에 이미 권유했던 다카다(高田)가 구단 대표를 맡는 주니치 드래곤스 등 프로 구단으로부터 권유를 받았다. 대학교에서도 권유가 있었다고 한다. 결국, 나카타니의 프로 입단 시의 인연으로 문철 감독의 이시카와 쇼지가 난카이에 호의를 가진 것도 있어서, 기즈카는 난카이에 입단했다.

1948년은 1년차이면서 7번·유격수로서 레귤러로 정착하여, 규정 타석 (37위, 타율.236)에도 도달했다. 그 해부터 6년 연속으로 베스트 나인에 선출되었다.

1949년에는 타율 .303 (리그 12위)으로 타격이 개화했다. 또한 그 해부터 4년 연속으로 도루왕을 획득했다.

1949년 9월 29일의 다이요전 제1경기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1경기 6실책 (유격수로 3, 3루수로 3)을 기록했다. 직후 제2경기에서 한신의 혼도 야스지가 2루수로서 1이닝 4실책을 기록한 것으로부터, 그라운드의 정비 불량이 주요 원인으로 생각된다. 다만 실책은 많아 1948년, 1949년, 1951년에 리그 최다 실책을 기록했다.

1950년에는 2번 타자로 정착하여, 타율 .301 (8위)를 기록. 그 해 6월 5일의 니시테츠전에서는 7회에 1이닝 3도루 (일본 타이기록)를 기록했다. 이 해는 시즌 78도루를 남겼다. 호크스의 선배 가와니시 토시오를 능가하는 당시 프로 야구 기록이었으며, 아직 기록을 늘릴 수도 있었지만, 도큐 플라이어스 대표인 사루마루 겐이 "팀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달리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그 이상 도루를 하는 것이 바보 같아져서 남은 경기에서 한 번도 도루를 하지 않았다.

1951년에는 타율 .319 (5위)를 기록. 1루수 이이다 도쿠지, 2루수 야마모토, 3루수 카게야마 카즈오 등과 '''백만 달러의 내야진'''을 형성했다. 그 해에도 55도루를 기록하여 도루왕을 획득한다. 요미우리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전 5경기에 선발 출장했지만 19타수 4안타로 끝났다.

1952년에도 도루왕을 획득하여 리그 우승도 이루지만, 요미우리와의 일본 시리즈는 단 1안타로 끝나, 활약의 장은 없었다.

1953년, 요미우리와의 세 번째 일본 시리즈도 18타수 3안타로 부진했지만, 최종 제7전에서는 6회 초에 벳쇼 타케히코로부터 일시적으로 역전이 되는 홈런을 날려, 자존심을 보였다.

기즈카에게 마지막이 되는 1955년의 요미우리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27타수 2안타로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고, 팀도 요미우리와의 일본 시리즈 4연패를 당한다.

1956년, 프로 입단 9년차의 그 해 시즌 오프, A급 10년 선수 제도가 적용되기 전 해에 금전 트레이드로 긴테츠 펄스로 이적했다. 당시에는 10년간 동일 구단에 재적한 선수에게, 보너스의 수급 (재계약금)을 받거나, 소속 구단에서 이적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할 권리가 주어지는 10년 선수 제도가 있었다. 재적하여 실동 10년의 선수에게는 보너스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규정은, 지출이 늘어나게 되기 때문에 난카이와 같은 가난한 구단에게 있어서는 고민거리였으며, 종종 주력 선수의 방출이 이루어졌다. 난카이의 주력 선수였던 기즈카도 이에 해당하여, 구단은 타선의 대형화를 꾀함과 동시에 기즈카를 트레이드했다 (유사한 예로 오사와 게이지가 있다). 팀의 4번 타자였던 이이다도 같은 해에 이 제도로 인해 난카이 구단으로부터 보너스의 지불을 꺼려져, 국철로 이적했다.

양대 리그 출범 첫 해인 1950년 투수들이 주로 다는 등번호 14번으로 변경했고 1952년까지 4년 연속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는데,[19] 이들 중 78도루를 기록한 1950년 도루 실패는 불과 8개였다.[20]

3. 은퇴 이후

은퇴 후 긴테쓰 1군 코치(1962년~1966년), 도쿄 1군 코치(1967년~1968년)를 역임했다. 도쿄 퇴단 후 오사카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했다.

1987년 12월 16일 향년 63세로 사망했다.

4. 선수로서의 특징

사가 현립 가라쓰히가시 중학교 출신인 기즈카 주스케는 3루수로서 빠른 발, 강한 어깨, 강한 타격을 겸비하여 '모지 철도의 붉은 악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5] 1948년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하여 주전으로 활약하며 강한 어깨는 '바보 어깨'라고 불릴 정도였고, 빠른 발과 함께 많은 인기를 얻었다. 수비는 견고함보다는 화려함이 돋보였으며,[16] 넓은 수비 범위와 송구 동작에서의 빠른 포구,[16] 화살 같은 송구가 특징이었다.[16]

1949년부터 4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했으며, 이 기간 동안 246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8할 5푼 5리의 높은 성공률을 보였다.[16] 통산 3번의 타율 3할을 기록했고, 야마모토 가즈토(쓰루오카 가즈토), 이이다 도쿠지, 가게야마 가즈오와 함께 '백만 달러의 내야진'을 구축했다. 기즈카는 역대 최고의 유격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기도 한다.[16]

1949년 9월 29일 다이요 로빈스와의 경기에서는 1경기 6실책(유격수 3개, 3루수 3개)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이는 경기장 정비 불량 때문으로 여겨진다. 1950년 6월 5일 니시테쓰 클리퍼스 전에서는 7회에 1이닝 3도루(일본 타이 기록)를 기록했다.[17]

요시다 요시오는 기즈카의 플레이를 보고 배우며 "기민하고 어깨가 강하며 다이내믹해서 최고의 본보기였습니다"라고 말했다.[3] 노무라 가쓰야는 자신이 뽑는 일본 야구 역사상 최강 멤버로 유격수에 기즈카를 선택하며 "지금까지 봐온 쇼트 중에서 오른쪽으로 나아갈 자는 없다"라고 평가했다.[11] 1950년부터 1952년까지 3년 연속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으며,[19] 특히 1950년에는 78개의 도루를 기록하면서도 도루 실패는 8개에 불과했다.[20]

5. 에피소드


  •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스카우트 제의를 “나는 돈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라며 거절한 선수로 유명하며, 규슈 남아의 기개를 보여준 선수였다. 메이저 리그에서 초청받은 첫 번째 일본인 선수이기도 했다.[13]
  • 요시다 요시오는 기즈카의 플레이를 보고 배우며 “기민하고 어깨가 강하고 역동적이고 가장 모범적인 선수였다”고 말했다.[15]
  • 노무라 가쓰야TBS TV 프로그램 《우타방》에 출연했을 때, 자신이 뽑은 일본 야구 역사상 최강의 멤버 중 유격수 부문에 기즈카의 이름을 올렸다. 노무라는 “지금까지 봐왔던 유격수 중에서 오른쪽으로 나오는 사람이 없다”고 평가했다.[18]
  • 노년에 아이들을 지도할 기회가 있었을 때, 글러브에서 손가락을 빼고 있던 아이에게 “꼬마야, 손가락을 내면 안 돼”라고 주의를 줬다. 그러자 아이는 “하지만 하라시노즈카도 그렇게 하잖아요”라고 반문했다. 이에 기즈카는 “요즘 선수들은 손이 아파서 손가락을 빼는 것이다. 아프면 야구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6. 상세 정보

기즈카 주스케는 사가 현립 가라쓰히가시 중학교·고등학교 (현·사가현립 가라쓰히가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2][3] 철도부 모지 관리국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3루수로 활약하며 ‘모지 철도의 붉은 악마’라고 불렸다.[15]

1948년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하여 1년차부터 주전 선수로 활약, ‘'''바보 어깨'''’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강한 어깨와 빠른 발을 자랑했다. 특히 수비에서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이며 넓은 수비 범위와 빠른 송구를 자랑했다.[16] 1949년부터 4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하며 통산 479개의 도루를 기록했다. 이이다 도쿠지, 가게야마 가즈오 등과 함께 '''백만 달러의 내야진'''을 구축하며 활약했고, 뛰어난 유격수로 평가받았다.[16]

1949년 9월 29일 다이요 로빈스와의 경기에서 1경기 6실책(유격수 3개, 3루수 3개)을 기록하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지만, 이는 당시 열악한 구장 환경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6월 5일 니시테쓰 클리퍼스 전에서는 1이닝 3도루(일본 타이 기록)를 기록하기도 했다.[17]

1956년 긴테쓰 펄스로 트레이드되어 1959년 은퇴할 때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은퇴 후에는 긴테쓰와 도쿄 오리온스에서 코치를 역임했으며, 이후 오사카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했다.

선수 시절 수상 및 타이틀 경력은 다음과 같다.

타이틀
수상



개인 기록으로는 통산 도루 성공률 80.8%(479도루 114도루 실패)로 역대 4위(300도루 이상 기준)를 기록했으며, 올스타전에 6회(1951년 ~ 1956년)[14] 출장, 통산 런닝 홈런 5개(일본 타이 기록)를 기록했다.

주요 선수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소속팀주요 기록
1948난카이베스트 나인
1949난카이타율 .303 (리그 12위), 도루왕(59개), 1경기 6실책(일본 기록), 베스트 나인
1950난카이타율 .301 (8위), 도루왕(78개, 당시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 1이닝 3도루(일본 타이 기록), 베스트 나인
1951난카이타율 .319 (5위), 도루왕(55개), 최다 안타, 베스트 나인
1952난카이도루왕(55개), 베스트 나인
1953난카이베스트 나인
1954난카이시즌 런닝 홈런 2개(일본 타이 기록), 월간 런닝 홈런 2개(일본 기록)
1955난카이
1956난카이통산 1000경기 출장 달성(역대 38번째)
1957긴테쓰
1958긴테쓰
1959긴테쓰



등번호는 다음과 같다.

연도등번호
1948년 ~ 1949년3
1950년 ~ 1959년14
1962년1
1963년 ~ 1966년40
1967년 ~ 1968년54


6. 1. 출신 학교

사가 현립 가라쓰히가시 중학교·고등학교 (현·사가현립 가라쓰히가시 고등학교) 출신이다.[2][3]

6. 2. 선수 경력

사가 현립 가라쓰히가시 중학교 출신으로 철도부 모지 관리국에서 3루수를 맡아 빠른 발, 강한 어깨, 강한 타격의 3박자를 갖춘 활약으로 ‘모지 철도의 붉은 악마’라고 불렸다.[15]

1948년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하면서 1년차부터 주전 선수로 활약했는데, 강한 어깨가 ‘'''바보 어깨'''’라고 불리며 빠른 발과 함께 인기가 많았다. 3루의 정수비에서 지키고 있던 야마모토 가즈토(쓰루오카 가즈토)의 고간을 빠져나간 타구를 1루에 멀리 던져 잡아냈다는 등의 전설적인 일화를 남겼다. 기즈카의 수비는 견고하기 보다는 화려했으며[16] 수비 범위가 넓었고 송구하는 흐름 속에서 공을 잡아내[16] 화살 같은 공을 던졌다.[16] 1949년부터 4년 연속으로 도루왕을 차지했다. 이 4년간 246개의 도루를 기록했으며 성공률은 8할 5푼 5리에 육박했다.[16] 타율 3할을 3번 기록했으며 야마모토, 이이다 도쿠지, 가게야마 가즈오와 함께 '''백만 달러의 내야진'''을 형성했다. 역대 굴지의 이름난 유격수라는 평도 받았다.[16]

1949년 9월 29일다이요 로빈스와의 첫 번째 경기에서 1경기 6차례의 실책(유격수에서 3개, 3루수에서 3개)을 기록했다. 직후의 두 번째 경기인 한신 타이거스의 경기에서 혼도 야스지가 2루수로 1경기 4차례의 실책을 기록했기 때문에 그라운드의 정비 불량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950년 6월 5일니시테쓰 클리퍼스 전에서는 7회에 1이닝 3도루(일본 타이 기록)를 기록했다.[17]

1956년 시즌에 타선의 대형화를 도모하던 구단의 구상에서 벗어나 긴테쓰 펄스에 트레이드로 이적했고, 1959년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6. 3. 지도자 경력

긴테쓰 1군 코치(1962년 - 1966년), 도쿄 오리온스 1군 코치(1967년 - 1968년)를 역임하였다. 도쿄 오리온스 퇴단 후에는 오사카에서 레스토랑을 경영했다.

6. 4. 수상·타이틀 경력

기즈카 주스케는 선수 시절 다음과 같은 타이틀과 상을 받았다.

타이틀
수상


6. 4. 1. 타이틀

6. 4. 2. 수상

6. 5. 개인 기록

연도소속팀주요 기록
1948난카이1년차부터 주전 선수로 활약, 베스트 나인
1949난카이타율 .303 (리그 12위), 도루왕(59개), 1경기 6실책(일본 기록), 베스트 나인
1950난카이타율 .301 (8위), 도루왕(78개, 당시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 1이닝 3도루(일본 타이 기록), 베스트 나인
1951난카이타율 .319 (5위), 도루왕(55개), 최다 안타, 베스트 나인
1952난카이도루왕(55개), 베스트 나인
1953난카이베스트 나인
1954난카이시즌 런닝 홈런 2개(일본 타이 기록), 월간 런닝 홈런 2개(일본 기록)
1955난카이
1956난카이통산 1000경기 출장 달성(역대 38번째)
1957긴테쓰
1958긴테쓰
1959긴테쓰
통산도루왕 4회, 베스트 나인 6회, 올스타전 출장 6회


  • 통산 도루 성공률: 80.8% (479도루 114도루 실패) ※역대 4위 (300도루 이상 대상)
  • 올스타전 출장 : 6회(1951년 ~ 1956년)[14]
  • 통산 런닝 홈런 : 5개 ※일본 타이 기록

6. 6. 등번호

연도등번호
1948년 ~ 1949년3
1950년 ~ 1959년14
1962년1
1963년 ~ 1966년40
1967년 ~ 1968년54


참조

[1] 서적 プロ野球人名事典 2003 日外アソシエーツ 2003
[2] 뉴스 ホークスの歩み(1930年~1950年) https://www.softbank[...] 福岡ソフトバンクホークス 2020-03-25
[3] 서적 感涙!ナニワ野球伝説 朝日新聞出版 2011
[4] 간행물 プロ野球データファイル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5] 서적 鶴岡一人の栄光と血涙のプロ野球史
[6] 서적 HAWKS the 70th―ホークス栄光の軌跡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08
[7] 문서
[8] 뉴스 ホークスの歩み(1951年) https://www.softbank[...] 福岡ソフトバンクホークス 2020-03-26
[9] 뉴스 ホークスの歩み(1952年) https://www.softbank[...] 福岡ソフトバンクホークス 2020-03-31
[10] 문서
[11] 웹사이트 【8月16日】1954年(昭29) イダ天・木塚忠助 今でも記録の1カ月ランニング本塁打2本 https://web.archive.[...] SPORTS NIPPON NEWSPAPERS 2011-10-28
[12] 서적 南海ホークス栄光の歴史―1938ー1988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2
[13] 문서
[14] 뉴스 ヤクルト村上達成の「パーフェクト・スチール」 過去の達成者は? イニング3盗塁データ https://www.sponichi[...] 2020-11-05
[15] 서적 감격의 눈물! 나니와 야구 전설 아사히 신문 출판 2011
[16] 서적 난카이 호크스 영광의 역사 : 1938 ~ 1988 베이스볼 매거진사 2012
[17] 서적 HAWKS the 70th - 호크스 영광의 궤적 베이스볼 매거진사 2008
[18] 웹사이트 【8月16日】1954年(昭29) イダ天・木塚忠助 今でも記録の1カ月ランニング本塁打2本 http://www.sponichi.[...] SPORTS NIPPON NEWSPAP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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